
단순한 형태를 가졌지만 다양한 활용이 가능하다면 그건 분명 좋은 도구일 것이다. 손가락 마디만 한 크기의 카라비너는 내게 있어 가장 이상적인 도구에 가깝다.
작년 1월, 한 달 동안 유럽을 여행했다. 짐은 많았고, 하루하루 새로운 장소에서 시작되고 끝나 정신도 없었던 여행이었다. 배낭 하나에 의지한 채 5개국을 넘나들었고, 가슴팍에는 늘 슬링백이 걸려 있었다. 유럽 여행을 갈 때 항상 사람들이 하는 조언이 있다. "소매치기를 조심해라". 나 역시도 여행가기 전부터 계속 들었기 때문에 짐 관리에 유독 신경을 많이 썼다. 귀중품들은 모두 슬링백에 넣었고, 다이소에서 산 작은 자물쇠로 한번 더 잠갔을 정도였다.
그렇게 철저하게 준비했지만 유럽에 막상 가보니 한가지 불편함이 생겼다. 우리가 묵은 숙소 대부분은 여전히 '열쇠'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작은 슬링백 안에는 이미 여권, 에어팟, 멀티툴, 향수 같은 물건들이 걸려있었고, 이들을 지퍼 속 고리에 하나씩 걸어둔 상태였다. 더 이상 연결할 고리는 없었다. 열쇠를 그냥 가방 어딘가에 넣어두자니 불안했고, 불편함은 점점 커졌다.
그때 눈에 띈 게 혹시나 싶어 챙겨왔던 작은 카라비너였다. 집에 굴러다니던 물건이었는데 여행에서 필요 할 수도 있겠다 싶어 가져온 물건이었다. 시험 삼아 슬링백 속 고리들을 하나씩 카라비너에 걸어보았고, 마지막 열쇠까지 전부 연결할 수 있었다.
카라비너에 물건들을 걸고 나니 상황이 훨씬 나아졌다. 필요한 물건을 빠르게 골라 쓸 수 있었고, 때로는 슬링백을 집에 두고 백팩만 들고 나가야 할 때, 카라비너 하나만 떼어내 백팩 속에 걸어두면 됐다. 여행 중 가장 중요한 물건들을 담고 있던 카라비너는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안정감을 제공해주었다.


귀국 후 창고 속을 뒤져 남아 있던 카라비너들을 모조리 찾아 책가방에 매달기 시작했다. 시중에 판매 중인 제품도 몇 개 구매해보았고, 누군가 버린 카라비너가 보이면 일단 집으로 가져와 보관했다. 늘 예상치 못한 상황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멀티툴을 늘 가방에 넣어 다니는 편인데, 카라비너 역시 같은 맥락으로 늘 가방에 가지고 다닌다.
카라비너는 작지만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다. 물건을 연결할 수 있고 반대로 카라비너 자체를 어딘가에 걸 수도 있다.
줄과 줄을 이어줄 수 있으며, 카라비너끼리 연결도 가능하다. 튼튼하면서 가볍고, 형태가 다양하며 구조가 간단하다.
또 응급상황에서는 사람을 구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손가락 마디만 한 작은 도구가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보여주는가.





몸체와 입구로만 이루어진 극도로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열고 닫을 수 있다는 특징으로 인해 생기는 속공간 으로 카라비너는 다양한 사물들과 상호작용할 수 있다. 이 물건의 속공간은 꽤나 흥미롭다. 양옆이 뚫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부는 일종의 '공간'으로 작동하며 작은 물건들이 카라비너 공간 안으로 입주하듯 걸리게 되는데, 물건들에게 카라비너는 운동장이자 집이 된다.

또 카라비너의 속공간은 입구의 각도에 따라 공간의 성격이 달라진다. 입구를 조금 혹은 중간까지만 누르면, 닫혀 있던 공간이 열리면서 카라비너의 공간은 애매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입구를 끝까지 눌렀을 때는 오히려 닫힌 공간이 다시 형성되고, 동시에 열린 공간이 존재한다.
